한국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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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소나무
소나무 소나무 눈 내린 소나무ㅣ용인 한국민속촌 정의 한반도 전역에서 자라는 수종으로, 건축재나 가구재 등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나무. 개관 소나무는 궁궐과 종묘 건축재 및 가구재뿐만 아니라 군용 선박, 관곽재, 시목柴木 등 왕실과 관아 및 일반 백성에게도 중요한 자원이었다. 조선 조정은 소나무 주요 산지를 사산四山, 봉산封山, 금산禁山, 송전松田 등으로 지정하여 벌목을 법령으로 규제하였다. 15세기 이후 세종을 비롯하여 많은 왕이 소나무 벌채에 대해 엄격한 규정을 내렸고, 식재와 금송禁松에 대한 법령은 세부적으로 나뉘어 지정되었다. 소나무를 함부로 베는 자에게는 효시梟示의 무거운 형벌이 내려지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금송·보민保民·선산先山 유지 등을 목적으로 향촌 자치적 성격의 금송계禁松契가 결성되어서 소나무의 식재와 보호책이 마련되었고, 이것이 애림계나 식림계의 이름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소나무는 힘을 강하게 받는 기둥재 혹은 넓고 두꺼운 판재로도 활용되는 등 크거나 작은 목제용구에 모두 적합한 재료이며, 전국에 식재되는 나무로서 전통적으로 활용도가 가장 높았던 나무이다. 잔 나뭇가지 등은 땔감으로 이용되었고, 관솔은 조명구로 사용되었다.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인 송연松煙은 먹을 만들거나 안료로 사용되었다. 내용 조선시대에는 소나무를 위법하게 베는 것은 엄한 벌로 다스렸다. 『대전통편大典通編』의 봉산금송범작자封山禁松犯斫者에 “큰 소나무를 불법으로 베어낸 것이 10그루 이상이면 사형으로 논죄한다”라고 하였다. 나무가 자라기에 적합한 산을 봉산으로 지정하고 봉산의 큰 소나무를 10그루 이상 벤다면 사형에까지 이르는 형벌을 법령으로 세워 둔 것이다. 도성의 4개 산이나 공궐空闕 또는 도성 10리 이내의 소나무를 베는 것 역시 중한 벌이 내려졌다. 『전록통고典錄通考』의 사산산직四山山直에 따르면 금표禁標로 표시한 한양 도성을 잇는 4개의 산에서 소나무를 베어 가는 자에게 벌금을 징수한다고 하였다. 이때 말라 죽은 소나무 2그루는 살아 있는 소나무 1그루에 해당하며, 모두 베[布] 1필을 징수하고, 가지나 뿌리의 경우에는 10그루마다 1필을 징수하며, 이를 적발하여 신고한 자에게 준다는 기록이 전한다. 죽은 소나무까지도 규제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오면 소나무 수요가 급증하여 이러한 금제만으로는 산림 운영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민간 혹은 관의 주도로 금송계가 결성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금송계는 촌계村契의 일종으로, 18세기부터 나타나서 20세기 초까지 명맥을 이어 나갔다. 관 주도 또는 지방 사족들이 주도한 금송계와 마을 사람들이 주도한 금송계 등으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이를 통해 나무를 식재하고 산림을 보호하는 정책이 지역마다 자치적으로 마련될 수 있었다. 정조 이후로는 왕실의 목재 수급도 봉산 등지의 관리 지역이 아니라 목재 상인을 통해 이뤄지게 된다. 소나무는 전국에 식재되는 나무이며, 결이 곧고 성질이 단단해서 고주高柱와 같은 큰 규모의 건축물이나 가구 또는 일상 생활용구 및 농기구·악기·땔감 등에 이르기까지 가장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던 나무이다. 소나무와 매우 흡사한 나무로 잣나무를 들 수 있다. 소나무가 3엽인 데 비해 잣나무는 5엽으로 구분된다. 소나무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 지역에서 나는 양질의 소나무로서 한옥 목재로는 으뜸으로 여겼다는 춘양목, 백두대간의 질 좋은 나무로 널리 알려진 금강송이나 육송 등이 있다. 아울러 낙엽송(혹은 오엽송, 잣나무), 해송(해안가에서 자라는 소나무인 곰솔, 혹은 잣나무) 등의 명칭은 소나무가 아닌 잣나무 등으로 수종을 달리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소나무는 전국에서 자라고 조선시대부터 그 식재를 육성한 만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목재 중 하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규모가 작은 생활공예품에서부터 가구와 큰 규모의 건축 부재에 이르기까지 소나무가 쓰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조선시대 목조 가구에도 작은 규모의 함궤函櫃는 물론이고 큰 가구인 반닫이나 장, 농, 뒤주 등 사용 판재의 크기에 구애 없이 소나무가 사용되었다. 소나무의 곧은 결은 사랑방과 잘 어울려서 서안·문갑·탁자 등 모든 가구재에 애용되었고, 안방가구나 부엌가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일반 사가뿐만 아니라 사찰의 가구나 목동자 등 목조 불상에도 소나무의 비중이 높다. 그리고 창호·기둥·대들보와 같은 건축 부재, 선박 등에서도 소나무가 활용되었다. 특징 및 의의 소나무는 건축재와 가구재로 활용도가 높았던 재목으로 주목된다.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기도 하지만 단단하고 강한 나무이기도 하고 결이 뚜렷하여 자체가 아름다운 장식재로도 활용이 가능해 예부터 내려오면서 널리 애용되는 목재이다. 조선시대 의궤에서는 소나무의 사용처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중 송연은 소나무 그을음으로 먹의 재료로도 사용되는데, 목재에 칠을 하거나 수리를 하는 데 필수적인 안료 역할을 하였다. 송연은 기름과 섞어 검은 칠 효과를 내는 데도 사용되었다. 소나무궤 이 밖에 곧은 소나무 정판正板이나 얇은 판[薄板]은 궤나 함 등의 가구로, 두께감 있는 넓은 판[廣厚板]형태는 목조 건축의 각 부재로 사용되었다. 조리목條里木 같은막대형 재목은 가구의 다리 등을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 소나무를 태워 만든 목탄인 송탄松炭은 불을 지피는 숯이나 행사용 등 다용도로 사용되었다. 송명松明은 관솔불을 말하는 것으로, 송진이 엉긴 부분이다. 이것은 불을 밝히는 조명도구로 사용되었다. 송지松脂는 송진으로, 의궤에서 물품 제작에 필요한 재료로 쓰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의 사료에는 지갑紙甲을 만드는 원료로 송지가 사용되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 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국립민속박물관 (무단전재 -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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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눈썰매
눈썰매 눈썰매를 즐기는 어린이들 정의 겨울철에 비탈진 눈길이나 얼음 강판 위에서 썰매를 타고 즐기는 어린이놀이. 내용 썰매의 형태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일반적인 것은 어린이가 앉을 만한 널판 바닥에 적당한 높이의 각목을 나란히 붙이고 여기에 대나무나 쇠줄을 박아서 눈이나 얼음 위에서 잘 미끄러지도록 만든 것이다. 탈 때에는 끝에 뾰족한 쇠꼬챙이를 꽂은 송곳을 양손에 쥐고 이를 이용하여 썰매를 움직이거나 방향전환 또는 멈춰서는 동작을 한다. 그러나 송곳으로 양쪽의 얼음을 찍어가며 타는 방법으로는 속도가 느려서 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보통은 한 어린이가 탄 썰매를 다른 어린이가 뒤에서 민다. 이때 능숙한 아이는 일일이 송곳을 쓰지 않고 몸을 틀어서 방향을 잡는다. 기차놀이라고 하여 여러 어린이의 썰매를 한 줄로 이어 붙이고 밀거나 당기는 방법도 있다. 전통 썰매 눈밭이나 얼음판이 좁은 도회지에서는 썰매와 썰매가 부닥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썰매 자체의 바닥을 높게 하며, 앞에는 자동차의 범퍼처럼 도막나무를 붙이기도 한다. 그 이유는 높은 썰매는 상대에게 겁을 줄 뿐 아니라 충돌하였을 때 부상의 위험이 적기 때문이다. 또 송곳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썰매의 좌우양쪽 끝에 못이 박힌 주걱모양의 나무를 붙이고 방향을 바꿀 때는 이것을 잡아당기도록 고안한 것도 있다. 평평한 데에서는 썰매 위에 올라앉아서 이곳저곳을 옮아 다니지만 비탈진 곳에서는 엎드리거나 누워서 타기도 한다. 특히 누워서 탈 때에는 내어 뻗은 두 다리로 방향을 잡는다. 힘을 적게 들이고도 빨리 달리도록 하려면 바닥의 날이 좋아야 하지만, 그보다도 날이 정확하게 평행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눈이 많이 내려 두껍게 얼었을 때에는 굵은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어 앞쪽이 약간 들리도록 구부린 댓가지에 양발을 얹고 얼음을 지치기도 한다. 댓가지 썰매는 비탈진 데에서 타기도 한다. 산간지대의 사냥꾼이 곰이나 멧돼지를 잡기 위하여 겨울철에 이용하는 눈썰매도 이러한 종류의 것이다. * [출처: 썰매타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단전재 -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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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군밤
군밤 군밤 정의 밤나무의 열매. 내용 밤은 관혼상제에 필수적인 과실로,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좋은 밤의 세계적 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700년 전인 진나라 때의 ≪삼국지 三國志≫ 위지동이전 마한조(馬韓條)에도 마한에서 굵기가 배만한 밤이 난다고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 後漢書≫에도 마한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큰 밤을 생산하고 있는데 굵기가 배만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수서 隋書≫에는 백제에서 큰 밤이 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북사 北史≫에도 역시 백제에서 큰 밤이 난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밤은 일찍부터 과실로 이용되었다. 제상에는 껍질을 벗겨 각이 지게 쳐서 높이 괴어 올렸으며, 주안상의 안주로도 많이 쓰였다. 또 다남(多男)을 상징하여 혼례 때 필수적인 과실이었다. 시부모에게 폐백을 올릴 때 아들을 많이 낳으라는 뜻에서 며느리에게 밤을 던져주는 풍속이 있다. 며느리는 그것을 받아두었다가 신방에서 먹는다. 이 밖에 삶거나 구워서도 먹으며, 특히 겨울철 밤거리의 군밤장수는 독특한 겨울철의 풍물을 자아낸다. * [출처: 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단전재 -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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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풍
단풍 단풍나무 단풍잎 정의 가을에 나뭇잎의 빛깔이 변화하는 자연현상. 내용 가을이 되어 기온이 0℃ 부근으로 떨어지면 나무는 엽록소의 생산을 중지하고 잎 안에 안토시아닌을 형성하여 붉은색, 갈색, 노란색 등으로 변한다. 그리고 안토시아닌 색소를 만들지 못하는 나무들은 비교적 안정성이 있는 노란색과 등색의 카로틴 및 크산토필 색소를 나타내게 되어 투명한 노랑의 잎으로 변한다. 또한, 붉은색의 안토시아닌과 노란색의 카로틴이 혼합되면 화려한 주홍색이 되는데 이것은 단풍나무류에서 관찰할 수 있다. 단풍의 빛깔은 동일 수종이라도 가용성 탄수화물의 양에 차이가 있어서 개체변이가 심하게 나타난다.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기 위해서는 날씨가 건조해야 하며 0℃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온이 차야 한다. 아름다운 단풍은 낙엽수종이 주로 만드는데 우리나라는 단풍을 만드는 나무의 종류가 많아서 가을이 되면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금수강산으로 변한다. 단풍을 만드는 수종으로서는 단풍나무·당단풍나무·신나무·복자기나무 등 단풍나무속에 속하는 종류와 붉나무·옻나무·빗살나무·화살나무·담쟁이덩굴·감나무·마가목·사시나무·은행나무·잎갈나무·생강나무·느티나무·자작나무·양버들·백합나무·머루·피나무류·참나무류 등이 있다. 단풍으로 이름난 곳으로는 설악산·내장산·가지산·지리산·북한산 등이 있다. 단풍은 산마루부터 시작해서 계곡으로 내려오고 북쪽에서 시작해서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이것은 한랭한 기온 변화의 차례 때문이다. 해에 따라 단풍이 드는 계절의 시작에는 차이가 많으나 대체로 10월 하순에서 11월 중순이 단풍의 계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음력 9월 9일인 중구절(重九節)에는 국화로 화전(花煎:꽃을 넣어 만든 부침개)을 만들고 계곡과 명승지를 찾아 단풍놀이를 하는 습속이 있다. 이 날은 부녀자·소년·소녀·농부들이 제각기 떼를 지어서 하루를 즐기는데, 문인들은 시를 짓고 풍월을 읊어 주흥을 내기도 하였다. 요즈음도 이때가 되면 각급 학교나 단체에서 단풍을 감상하는 소풍을 가는데, 이것은 오랜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출처: 단풍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단전재 -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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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달
달 보름달 정의 지구에 가장 가까운 위성이자 우주적 생명력의 전형으로 믿어진 종교상징물. 천체. 달의 상징성 달은 그 둥긂으로 말미암아 원만과 구족함의 상징이 되기는 하지만, 이내 찼다가 기우는 것이 달이다. 기욺과 참을 번갈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달의 결영(缺盈)주1은 연속적이고 동시에 반복적이다. 초승달에서 반달로, 다시 보름달로 옮겨가기까지 그 둥글어져 가는 과정이 빈틈없이 점진적이고 연속적이다. 그것은 생명의 점차적인 성장과도 같은 것이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아기에서 어른으로 자라나는 과정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던 달은 거꾸로 보름달에서 반달로, 그리고 다시 그믐달로 이울어가게 된다. 이것은 역으로 생명의 퇴조와도 같은 것이다. 장년에 다다른 한 인간이 늙은이를 거쳐 죽음에 다다르게 되는 과정과도 같은 것이다. 한편, 달은 이와 같은 참과 이욺을 주기적으로 되풀이한다. 그믐달이 사라지고 초승달이 다시 돋아나기까지 달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는 사흘 동안을 계산하게 된다면, 이러한 결영의 반복은 마치 하나의 생명이 성장, 퇴조하고, 죽음에 다다르는 일을 되풀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리하여 달은 매우 높은 상징성을 가지게 된다. 죽음을 아주 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비록 죽음에 든다고 해도 다만 일시 죽음에 들 뿐, 재생과 회생을 거듭하는 ‘죽음 있는 영속하는 생명’, 그것을 달은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한번, 지상의 삶을 누릴 뿐, 이내 죽음에 들고나면 그뿐이라는 자기인식을 가지게 된 인간들에게 달의 상징성은 아주 결정적인 것이 된다. 달과 생활력 음력, 곧 태음력은 말할 것도 없이 ‘달의 역(曆)’이다. 물론, 음력의 음(태음)은 단순히 달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양(태양)과 함께 우주적 조화의 궁극적인 이원소(二元素)를 이루고 있는 것이 음이다. 그러나 달은 그 태음의 정(精)으로 간주된 것이기 때문에 태음력을 곧 ‘달의 역’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전통 농어촌사회에서 달의 역인 음력은 크게는 생활력이자 농사력이었다. 달의 명절인 대보름(上元)과 중추(中秋)는 서로 짝지어져서 농사력의 시작과 결말을 뜻하고 있다. 상원이 달에게 바치는 농경의 예축(豫祝)을 위한 명절이라면, 중추는 농경의 수확을 달과 더불어 갈무리하는 명절이기 때문이다. 참다운 농사력의 시작이 상원이고 그 끝이 중추라고 본다면, 우리의 농사력은 달로 시작되고 달로 끝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정월초하루부터 보름까지를 통틀어서 ‘설쇠기’로 볼 수 있다. 초하루에서 비롯된 각종 기년 행사(祈年行事), 말하자면 ‘해빌이’가 상자일(上子日)에서 상해일(上亥日)에 이르는 12일 동안의 기축(祈祝)과 금기(禁忌)로 다져진 뒤 보름날에 다다라서 절정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정월초하루에서 보름에 이르는 각종 기년 행사의 점층적인 진행이 달이 둥글어져 가는 과정, 즉 달의 점층적인 진행과 병행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달에게 일년농사의 풍족을 미리 예축하는 상원행사는 달을 대상으로 한 점복행위(占福行爲)와 짝지어져 있다. 이것은 ‘달의 역’에 어울리는 한 해의 참다운 시작이 정월대보름임을 보여주고 있다. 정월대보름은 한 해의 첫 만월이기 때문이다. 다른 달의 보름은 작은 보름이라는 것을 상대적으로 전제하지 않고는 상원에 대자가 붙을 수 없다. 대보름의 대가 큰 대자라는 것은 상원의 중대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또 하나의 보름인 추석이 ‘한가위’라고 불리고 있음을 연상하게 된다. 한가위의 ‘한’ 또한 대(大)나 다(多)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일년 동안 열두 번 있게 되는 보름 가운데 상원과 중추의 보름에만 ‘대’나 ‘한’을 씌워서 이름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두 보름이 특별한 보름임에 대한 증거이다. 상원은 농사력이 시작되는 참다운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보름이라는 점에서, 한가위는 한 해의 농사력이 마무리되는 보름이라는 점에서 중대한 의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한 해 동안 두개의 대(한)보름을 가지고, 그것으로써 농사력의 시작과 끝으로 삼을 만큼, 만월에 대한 믿음과 꿈을 가꾸어왔던 것이다. 그것은 곧 풍요와 번영과 생명력에 대한 믿음이자 꿈이었던 것이다. 보름달이 둥글고 밝은 만큼, 우리들의 믿음과 꿈도 부풀고 또 빛을 더하였던 것이다. 대보름날은 세시풍속 전체로 볼 때, 가장 부푼 날, 가장 둥근 날이다. 그것은 세시풍속에 따르는 어떤 명절도, 대보름만큼 풍족하고 다양한 고사며 점치기, 그리고 놀이를 갖추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만큼 대보름은 명절 중의 명절이다. 대보름날 각종 행사의 핵은 아무래도 달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세시풍속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달에 대한 기년 행사도 점치기와 기축과 놀이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이 행사는 따로따로 치러지기보다는 하나로 어울려 복합적으로 치러지는 것이다. 달의 춤들 상원 세시풍속의 그 같은 의의는 상원 세시풍속의 일부인 「 강강술래」에서도 유추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강강술래」를 단순히 아름다운 민속무용으로만 알고 있으나 그것은 원천적으로 ‘달의 춤’이었던 것이다. 민간어원설에 불과한 이른바 임진왜란 기원설에 오염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춤의 형상 자체가 이미 ‘달의 춤’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강강술래」는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호남의 남서해안지대에 퍼져 있는 민속집단무용이다. 주로 대보름과 한가위에 노는 이 춤은 여성들만의 춤이라는 특색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후렴이 지역에 따라서 “강강 수월래”, “강강 술래”, “광광 술래”, “광광광 술래”로 달라지듯이, 춤사위며 춤의 형태에도 약간의 지역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강강술래」는 원칙적으로 동그라미춤[圓舞, 또는 圓陣舞]이다. 강강술래 안동지방의 「놋다리밟기」도 부분적으로는 원진의 달춤이었음을 여기서 덧붙이고 싶다. 정월대보름날 「강강술래」라는 이름의 달춤을 추는 여인들은 달의 신생력과 재생력, 그리고 그 풍요의 원리를 지상에 옮겨서, 지상의 것으로 삼으려는 그들의 소망 그 자체를 춤으로 추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달춤을 추는 여인들을 지상의 월궁 항아(月宮姮娥)라고 하여도 그것은 결코 시적인 과장에만 그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주석 주1 기욺과 참. * [출처: 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단전재 - 재배포금지